자기가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기가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네. … 그렇지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여전히 생가하는 자들이 남아 있네. 그렇기 때문에 아직 훌륭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자들이 지혜를 사랑하네 향연소크라테스플라톤
골자가 말했다. “자로야! 너에게 앎에 대해 가르쳐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앎이다.” 논어위정공자
무지의 자각이란 절망스런 심연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철학자들의 위대함과 기핑 판단하고 싶은가? 해당 철학자들이 얼마만큼 통렬하게 자신의 무지에 절망했는지 헤아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다른 누구도 그 무지의 심연을 채울 수 없기에, 그들은 자기만의 이성을 사용해서 그 심연을 차곡차곡 메워갔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앎’ 이자 철학함이다.
전근대사회에서 우주발생론 이 중요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주가 생긴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있다면, 전근대 사람들은 우주의 성원으로서 인간이 영위하는 삶의 이유와 목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첫째날 신은 빛을 만들어 빛과 어둠을 구분하고, 둘째 날 하늘의 모양을 만들며, 셋째 날 바다와 육지 및 초목을 만들고, 둘째 날 하늘의 모양을 만들며, 셋째 날 바다와 육지 및 초목을 만들고, 넷째 날 해와 달 그리고 별을 창조하며, 다섯째 날 물고기와 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여섯째 날 신은 육지 동물과 지금까지 만든 모든 것을 다스리는 인간을 함께 창조했다. 흥미로운 것은 신의 창조 과정에서 보이는 인간의 특권적 지위이다. 창세기 편에 따르면 신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서 인간을 창조했고, 또한 인간에게 “당을 정복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날, 지금도 우리가 일요일이라고 해서 일하지 않고 쉬는 이날, 신은 모든 창조 작업을 마무리하고 휴식을 취하게 된다. 창세기
기에는 구분이 있다. 맑고 밝은 것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무겁고 탁한 것은 응결되어 땅이 되었다. 맑고 미묘한 것이 모이기는 쉽지만 무겁고 탁한 것은 응결되기 어렵다. 그래서 하늘이 먼저 생기고 땅이 나중에 생겼다. 하늘과 땅이 부합한 기가 음양이 되고, 음양의 순수한 기는 사시가 되었으며 사시의 흩어진 기는 만물이 되었다. 회남자천문훈
생성되는 모든 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원인이 되는 어떤 것에 의해 생성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원인이 없이는 생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만드는 이(데미우르고스)‘이건 간에, 그가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을 바라보며, 이런 본으로 삼고서, 자기가 만든 것이 그 형태와 성능을 갖추게 할 경우에라야, 또한 이렇게 완성되어야만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티마이오스플라톤
자신들이 가진 무게라는 속성 때문에 원자들이 허공을 관통해 아래로 떨어질 때, 절대적으로 예견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들에서 그것들은 자신들의 직선 경로로부터 아주 조금, 단지 한순간의 위치이동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는 작은 정도로, 틀어진다. 만일 그것들이 직선 경로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모든 원자들은 빗방울처럼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허공을 관통하여 아래로 떨어지게 될 것이며, 일차적 성분들 사이에 어떤 충돌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며, 어떤 타격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적로 자연은 결코 어떤 것도 만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클리나멘 = Clinamen
마주침
세계는 물질적인 원자들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 그리고 의미는 무의미의 공간 속에서 우연히 생선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알튀세르 는 무한한 원자들 사이의 우발적인 마주침이야말로 플라톤과 기독교 사유에 맞설 수 있는 사유, 즉 진정한 유물론에 대한 철학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던 것이다.
마주침이 응고의 결과로 나오는 모든 것은 요소들의 ‘응고’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뒤이어 나오며, 이 사실로 말미암아 그것은 ‘응고하지’ 않을 수도 있고, 더구나 ‘마주침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마르크스는 이 모든 것을 , 분명히 몇 마디 암시 속에서이긴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돈 많은 사람과 벌거벗은 노동력의 ‘마주침’에 대해 그토록 자주 말할 때, 그의 정식 속에서 말하고 있다. 심지어 더 나아가 역사에서 이 마주침은 그것이 서구에 응고하기 전에도 여러번 일어났으나 당시에는 한 요소의 결여 혹은 몇몇 요소들의 배치의 결여로 ‘응고하지’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18세기와 19세기 포 강 유역의 이탈리아 국가들이 그 증거가 된다. 그곳에는 돈 많은 사람들과 테크놀로지와(강의 수력으로 가동되는 기계들의)에너지와 숙련 인력(실업 상태의 장인들)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 현상은 ‘응고하지’않았따. 아마 거기에는 마키아벨리가 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호소의 형태로 필사적으로 추구한 것이, 즉 가능한 생산을 흡수하기에 적절한 내부 시장이 결여되어 있었다. 마주침의 철학
평행으로 움직이는 비가 거대한 강물을 만들려면, 클리나멘과 아울러 마주침이 발생해야만 하는 법이다.